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칼뱅 (문단 편집) == 일화 == 인간적으로 칼뱅은 상당히 불우한 삶을 살았는데, 젊은 시절부터 가톨릭과 여러 정치적 세력들의 박해를 받아 피해다닌 것을 들 수 있다. 비단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정부뿐 아니라, 칼뱅의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달가워하지 않은 [[제네바]]의 민주화 세력과도 갈등이 있어 그들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고 7년간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적도 있었다. 가족사 측면에서도 상당히 불우하여, 칼뱅의 자식들은 거의 대부분 어린 나이에 병마로 숨지고, 아내 역시 병으로 잃고 만다. 칼뱅 자신도 매일 공부만 하느라 건강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뱅은 희대의 공부벌레였으며, 제네바에서 목사 직분을 받기를 거부한 이유도 목사 사역이 자기 공부를 방해할 것을 걱정해서였다. 물론 칼뱅이 사역을 거부하자마자 칼뱅의 선배이자 동료 목사가 되는 기욤 파렐이 저주까지 해가면서 칼뱅을 강제로 제네바의 목사로 만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고 제대로 앉아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다 한다.] 종교개혁 경력상 약간 선배인 루터가 1525년 전직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 이름이 보여주듯 하급귀족 태생이다.]와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이론적으론 루터가 성직자 비혼 문제로 카톨릭 교리를 공격하는 것에 동의하던 지지자들도 막상 전직 수도자가 당당하게 전직 수녀와 결혼한다는 행위 자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측근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막상 루터가 첫 테이프를 끊고, 결혼생활도 성공적으로 꾸리자 곧 일부로 성직자 비혼주의를 공격하고 결혼을 하는게 초기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다. 칼뱅도 이런 트렌드에 따라 신학적으론 카톨릭 교회의 성직 독신주의를 공격했는데 막상 본인 성격은 연애나 이성엔 너무나도 관심 없는 전형적인 내성적인 공부벌레 타입이라 주변의 적극 권유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고, 주변의 강권으로 잡은 중매결혼도 결혼식 파토내는 등 도통 흥미를 안보였다 결국 1540년, 플랑드르의 하급 귀족 가문의 딸이었던 이델레트 드 뷔르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칼뱅은 31살의 당시 기준에선 심각한 노총각이고, 이델레트는 아예 40살의 이미 결혼 한번 했고 애도 둘이나 봤는데 전남편이 병사한 미망인이었다. 안그래도 각종 병마와 위생 문제가 심각했던 시대였는데 당시 기준으론 중년과 노년 사이를 바라보는 나이에 재혼한 이후 출산이 건강에 심각한 무리를 끼쳤는지 둘 사이의 자식들은 전부 다 어린 나이에 병사했고, 부인 이델레트 또한 결혼생활 10년도 못가 1549년 병사했다.[* 이런 비극적인 가정사를 두고 당시 칼뱅을 적대한 카톨릭 교회쪽 사람들은 이단 수괴에게 하느님이 내린 천벌이라고 욕하고 씹었다] 아이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관계는 원만했고 칼뱅 본인도 막상 결혼 해보고 나니 공부에만 집중하게 해줄 수 있는 부인의 존재에 감사하며 이델레트가 사망한 이후 크게 슬퍼했다. 칼뱅이 동료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부인이 임종을 맞이할 때 칼뱅은 슬퍼하며 부인의 전 남편 사이에서 생긴 자식들도 책임지겠다고 했으나 죽어가는 부인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그 아이들은 이미 하느님에게 맡겼으니 당신은 하던대로 하느님의 일에만 집중하라고 책망했다고 할 만큼 이델레트 칼뱅은 남편 못지 않게 종교적으로 열정적이고 남편하는 일을 몸과 마음으로 백프로 지지한 여인이었다. 또한 칼뱅이 추구한 제네바 사회는 극도로 원리 원칙적으로, 싸움이나 예배 결석이 허용되지 않는 수준을 넘어 가벼운 [[도박]]이나 길가에서 노래 부르는 것, 필요 이상으로 맛이 있는 음식을 먹는 것 따위를 금지하는 등 칼뱅 본인에게 적용되는 금욕적인 기준을 모두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밀어붙이는 사회였다. 그리고 이런 사항들의 위반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최소 구류나 최대 사형이나 추방 등의 무거운 형벌[* 보통은 구류 정도였지만 사형이나 추방 등의 무거운 형벌이 생기게 된 이유는 칼뱅의 엄격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들이 칼뱅을 몰아내기 위해서 암살이나 폭동 등의 시도를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칼뱅의 동료 목사 중 한 명은 제네바에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독살당했으며, 칼뱅은 제네바에서 목사로 2번 임직되었는데, 첫번째로 쫓겨났을 때의 이유는 칼빈과 시의회의 마찰로 인한 것이었다. 2번째 임직 이후에도 쫓겨날 상황에 간 적이 많았지만, 동맹 도시들에 대하여 정치적, 종교적 우위를 지닐 수 있는 칼뱅의 가치 때문에 시의회는 그가 싫어도 번번이 칼뱅을 다시 내쫓기를 주저했고, 칼뱅은 정치적 이유로 죽을 때까지 제네바에 남을 수 있었다. 당시 신정체제 하에서 시의회가 목사를 인준했고, 의회가 인준한 목사에게 무슨 이유에서건 의회의 동의 없이 위해를 가하는 것은 의회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면에서 반역죄로 처단되는 것이 당시 자치 도시들의 관습이었다. 물론 개인의 신앙에 대한 내용을 국가권력이 형벌을 통해서 규율한다는 것 자체가 칼뱅을 따르는 현대 칼뱅주의자의 관점에서조차 언행불일치로 보일 수도 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는 [[정교분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시대적 한계로 보자.]이 일괄적으로 부과되었다. 또한 도둑질한 자는 산채로 끓는 기름에 집어넣어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시행하는 등 성경에서 중요시 하는 용서와 관용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칼뱅식 예배에 2번 빠졌다고 하여 사형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카드 놀이까지 사형시켰다는 부분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가벼운 수준의 카드 놀이나 주사위 놀이 정도는 허용되던 시기였다. 물론 판돈이 걸리는 도박이 되거나 간통, 폭리를 취하는 것 등은 법으로 금지되었는데 실제 이 법이 시행되던 제네바의 분위기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하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거기다 이 법령이 시행된 시기는 칼뱅이 제네바에 온 1503년 이전에 이미 제정되어 온 것이었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했다는 것에 대한 반론은 [[http://m.blog.naver.com/hoebok/20192766053|이쪽 링크]]를 참조하자. 단, 장로회 측 입장이므로 필터링은 알아서 하자.] 본인이 젊은 시절 종교적 의견의 자유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으로 승인한 교리와 다른 해석이나 입장은 철저하게 공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특히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화형]]되는 과정을 주도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칼뱅 본인이나 옹호자들은 '화형을 자비로운 교수형으로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로 칼뱅의 주도적 개입을 부정한다. 칼뱅이 정말 세르베투스를 용서할 마음이 있었다면 [[교수형]]을 받아내는 것 뿐만 아니라 목숨을 붙여 해외로 내보내는 일까지 얼마든지 가능했을 정도로 제네바에서 칼뱅의 입지는 탄탄했다고 반론도 있지만, 칼뱅이 제네바 시민권조차 없던 시기라 사실상의 정치참여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단, 이 사실이 칼뱅의 책임을 경감시킬 수는 있으나 과오를 없앤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당시는 반칼뱅주의자와의 싸움이 결정적일 때였다.[* 칼뱅은 말년에야 제네바 시민권을 받는데, 이는 시의회가 칼뱅의 정치적 가치는 인정하면서도 칼뱅과의 긴장 관계에 있는 의원들이 많아 번번이 시민권 부여안이 부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르베투스의 화형 결정은 칼뱅이 아니라 제네바 동맹 도시, 특히 강대했던 개신교 도시 베른[* 베른은 칼뱅이 살아있을 때 [[루터교회]]였으며, 제네바에 루터회의 의식을 도입하는 압력을 많이 넣기도 했다. 루터가 생전에 가톨릭 전례를 많이 혁파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 압력으로 이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칼뱅이나 제네바 시 모두 반발했다. 제네바와 베른, 장로회와 루터회의 싸움에서 칼뱅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제네바의 독립성이 강화되고, 제네바는 장로회, 혹은 개혁교회의 원산지(?)가 된다.]의 권고가 결정적[* 세르베투스는 베른에서의 권고가 오기 전까지는 칼뱅을 맞고소하며 표 대결에서 우위를 자신했다. 당시 종교적 문제는 시의회가 판결했기 때문이다.]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칼뱅이 비난받아야 하는 부분이라면 자신의 입지가 탄탄하든 아니었든, 세르베투스를 화형은 아니더라도 사형받도록 하기 위해 탄핵하고, 공박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즉 본인이 주장했던 종교적 자유에 대한 신념을 깨고, 세르베투스를 용인하지 못했다는 점이 최대의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술한 장로회 신학자들의 비석에도 이러한 불관용성을 과오로서 지적하고 사과하는 데에 분량을 가장 많이 할애하고 있다. 당대에 이 일로 칼뱅을 비난했던 카스텔리오[* 단 카스텔리오는 칼뱅과 [[키배]]를 떴던 경험이 있어서 칼뱅에 대한 원한이 있었다. 물론 칼뱅이 카스텔리오에게 보여준 태도 때문에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에서 더 크게 비판받는 경향이 있는데, 세르베투스 때와는 달리 칼뱅과 그 동료들은 카스텔리오는 제네바에서 추방하면서도 다른 대학에 추천서를 써줬기 때문이다. 카스텔리오에게는 관용을 베풀면서도 세르베투스는 칼뱅까지 나서서 사형을 주장했다는 점(칼뱅이 세베르투스에게 베푼 유일한 관용은 화형을 참수형으로 감형해달라고 한 것 뿐이다.)에서 세르베투스는 언행불일치 혹은 이중잣대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단, 세르베투스는 이전에 이미 스페인과 빈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사형판결을 받은 상태였고, 당시 이단으로 정죄되는 것은 '''살인죄'''와 동급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와 같은 학자들, 그리고 카스텔리오의 전기를 집필한 [[슈테판 츠바이크]][* 단 이 주장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나온 것으로 이 내용은 처형당한 세르베투스의 추종자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초에 장로회 신학자들이 제네바에 칼뱅이 독단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 카스텔리오 등의 학자들을 핍박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비석을 세움으로써 이 논란의 사실 여부는 어느 정도 결정났다고 할 수 있다. 1903년 제네바와 프랑스의 종교개혁 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350년 전인 1553년 10월 27일, 미셀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장작더미가 쌓였던 샹펠(Champel)의 자리에 세운 속죄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을 깊이 존경하고 감사하는 후예로서 종교개혁의 참된 원리와 복음에 따르는 양심의 자유에 확고히 서서, 그 시대의 실수이기도 한 그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 속죄비를 세운다. 1903년 10월 27일.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이전에 이미 세르베투스는 정통 기독교 신학을 거부하고 이단 사상[* 세르베투스의 사상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상이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가톨릭이건 루터파건 칼뱅파건 어느쪽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주장이다. 실제 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황제때부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들은 사형을 받았다.]을 주장하다가 '스페인'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파리로 도피하던 중에 칼뱅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이에 칼뱅은 세르베투스에게 기독교강요를 보내어 자신의 입장에서 바른 신앙으로 이끌고자 하였지만, 세르베투스는 그 기독교강요의 여백에 칼뱅을 경멸하는 낙서를 가득 써서 돌려보냈다는 것. 이후 세르베투스는 '기독교 재건'이라는 책을 칼뱅 몰래 출판하여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혀 이번에는 빈에서 다시 이단으로 단죄되어 사형집행 전에 제네바로 도망가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칼뱅의 반대파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내려진 이단판결을 물리치려고 제네바에 왔고 칼뱅은 세르베투스에게 제네바로 오지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지만, 결국 1553년에 체포되어 화형을 언도받게 된다. 체포후 재판과정에서도, 세르베투스는 칼뱅이 제네바에서 추방당하면, 칼뱅의 모든 재산을 자신이 가질 것이라면서 주제 넘게 이야기하기도 할 정도로 재판과정에서 자신만만해했으나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만장일치로 화형에 처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칼뱅은 이에도 좀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참수]]'''할 것을 요청하지만 시의회는 칼뱅에게 적대적이었기에 칼뱅의 요청을 무시하고 [[화형]]을 집행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1555년 이전까지의 제네바 시의회와 칼뱅은 그렇게 협조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설교를 길게 하는 목사를 규제하였으나 칼뱅은 설교를 길게 하였고 1553년에는 칼뱅의 교회에서 출교당했던 베르텔리에가 성찬을 받을 수 있도록 시의회에 요청하자 시의회에서는 그 요청을 받아들임으로 칼뱅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 적도 있었다. 이외에도 타지에 나갔던 목사들이 암살당한 배후로 의회 민주파가 꼽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다시 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장담하던 칼뱅은 자신이 참여한 예배에 대놓고 와서 잡힌 세르베투스의 처분을 놓고 스위스의 모든 개혁파 교회에 의견을 묻는 과정을 선택했다. 결과는 만장일치로 화형. 당시 삼위일체 교리의 부정은 가톨릭과 개혁파 모두 살려둘 수 없던 죄였고,[* 이러한 이단자들을 받아줄 곳은 프로이센과 네덜란드가 포함된 저지대 일부에 불과했다. 투르크로 가서 무슬림이 되거나 종교세를 낼 것이 아니라면...] 최종 처분은 제네바의 의회의 집행에 넘겨졌다. 애초에 칼뱅의 결정을 의회가 받아들일 의무도 없었건만 당시 사회의 분위기로는 화형이 당연했다. 요약하자면 칼뱅에게 과도한 책임을 묻는 것은 정황상 과도하다는 것이 최근 제네바 컨시스토리의 중세 프랑스어 문헌을 연구하며 나오는 칼뱅 연구자들의 최근 주장이다. 대표적으로는 칼뱅 연구자인 장신대 박경수 교수 등의 연구가 있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카스텔리오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은 종교적 신념을 처형이나 화형으로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칼뱅이 그런 관행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않고 이를 수용한 것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최근에는 이러한 입장에 변화가 생겼다. 당시 제네바 시의회의 회의자료와 칼뱅이 직접 작성한 서신 등의 자료들이 공개되고 추가로 연구되면서 칼뱅이 억울하게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칼뱅은 자신이 시의회를 움직일 권한 자체가 없었으며, 세르베투스의 화형은 시의회가 강하게 밀어붙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흔히 칼뱅을 종교적 권력을 바탕으로 제네바의 정치권력까지 휘두른 철의 개혁가 정도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수시로 의회의 견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칼뱅을 비난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 책은 유명한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인데, 이 책은 2023년 현재 기준으로 적어도 100년 전에 집필되었으며, 사료조사 등이 깊지 않다. 시의회 회의록이 공개되고 연구자료로 활용된 것은 21세기에 들어서인데, 그전까지 칼뱅은 계속 세르베투스를 죽인 모략가의 이미지를 뒤집어쓴 것이다. 한국에서의 실제 칼뱅의 삶에 대한 자료는 [[장로회]]쪽의 연구자료가 상당히 많은데 당연히 장로회의 기원이 바로 이 칼뱅주의이기 때문이다. 이쪽 자료도 한번 참고해보자. [[http://m.blog.daum.net/kmspower/11586|#]] 확실한 것은 평생 맥주를 퍼마시며 입을 열 때마다 '''교황은 내 똥방귀나 처먹어라!'''라는 식으로 수 없이 말했고, 결혼 생활도 열정적이었던 루터에 비하면 칼뱅은 좀 너무 담백해서 드라마틱한 맛은 덜한 편이다(...). 사실 신학적, 역사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루터보다 더욱 더 독창적이고 체계적이었던 칼뱅이 인물사적 측면에서는 덜 알려진 것도 업적은 둘째 치고 일단 인간으로서 여러 모로 다이내믹하게 요리조리 펑펑 튀며 동시대인들이나 후대인들에게나 빅 재미를 안겨준 루터와 달리 수수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던 점도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